아이누

골든 카무이 시대의 북방 민족

피리카 2023. 1. 13. 19:40

잡지 MOE 2021, 12월호 발췌

 

타무라 마사토
국립 아이누 민족박물관 전시기획실장. 사할린 원주민 연구자.

 

러일전쟁 막바지였던 1905년 7월 7일 일본군은 러시아령 사할린섬에 상륙하여 9월에 걸쳐 전 섬을 점령했습니다. 당시 사할린 북위 50도 이남의 남반부에 사할린 아이누(1,800여 명), 북위 50도 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윌타(200여 명)와 니브흐(4000여 명)가 살고 있었습니다. 사할린 아이누와 니브흐는 송어를 비롯해 산나물, 바다표범과 바다사자 등 바다 동물을 주요 식량으로 하며 개 썰매를 몰던 교역의 백성이기도 했습니다. 윌타는 순록 썰매를 탔고 언어는 퉁구스계로 청 왕조를 일으킨 만주와 같은 계열이었습니다. 원주 민족의 세 언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로 서로 통하지 않고, 또한 일본과 러시아의 교섭을 포함해, 5개 민족 간에 사할린에서의 공통어는 아이누어 사할린 방언이라고 하는 것이 19세기의 언어 사정이었습니다.

러일전쟁 중, 러시아령 사할린에 살던 사할린 아이누들은, '친일'로 간주되어 살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군에게 스파이로 협력한 사할린 아이누 남성도 있었습니다. 민족학자 브로니스와프 피우스츠키가 만든 기숙학교에 다니던 사할린 아이누 어린이들은 사할린이 전쟁터가 되면 부모와 함께 죽고 싶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전쟁은 아이들에게도 큰 불안을 주었습니다. 오랫동안 일본 어민들이 여름 동안 러시아령 사할린에 출어했던 관계로 일본과의 관계가 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1875년, 사할린 전 섬이 러시아령이 되었을 때, 사할린 아이누 약 2,000명 가운데, 사할린 최 남부에 살고 있던 841명은 홋카이도로 이주를 결정했습니다. 3년 이내에 그대로 잔류할지 일본으로 이주할지를 결정하면 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만, 일본 측이 일본 어업자의 철퇴와 동시에 사할린에 이주를 강요하는 형태가 되어 황급히 배에 오른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할린 아이누는 대안으로 홋카이도·왓카나이 주변으로의 이주를 희망했지만, 개척사인 쿠로다 기요타카 장관은 애초부터 삿포로 근교의 대안(에베츠시)으로 이주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듬해인 1876년, 사할린 아이누 지도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제 이주가 결행된 것입니다. 여기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아이누 어린이를 위한 학교가 세워지고 제망공장 등 수산 정책도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1886년 콜레라가 유행하여 약 300명이 사망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속속 러시아령 사할린으로 비자를 신청하고 귀환했습니다. 다만 예전에 살던 마을은 황폐해졌고, 귀환자들은 먼 친척을 의지해 다른 지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골든 카무이에서는 이 역사적인 장면을 러일전쟁 후 아시리파에 의한 회상 장면으로 그리고 있습니다.